전체 글(282)
-
일흔 살 소년들의 오후
한 여름 복중인데 여기는 가을이다. 쉴 새 없이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인다. 무심결에 따라온 자린데 자꾸 마음이 설레는 까닭은, 곁에 앉은 정 장로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구분은 어렵지만 기회가 되면 꼭 전하리라, 마음에 품어 온 생각이 들썩거린다. “다들 트레일 따라 걷는다고 저기 발전소 너머로 갔는데, 집사님은 안 가십니까?” “그러는 장로님은?” “오랜만에 바람을 맞으니 가슴이 설레서, 그냥 여기서 뭉개고 싶네요.” “허허, 사철 반듯하신 분이 뭉갠다는 표현을 하니 뜻밖이긴 한데, 외려 산뜻하고 풍미가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닌데 두 남자는 꼭 존칭한다. 태어난 연도는 한 해 차이가 나지만 정확히는 다섯 달이다. 다니는 교회에서 만난 지 30년이 되는 동년배인데, 지나..
2026.08.21 -
어느 소심한 삶의 위대한 일탈
“정말 MTB를? 언제부터래? 믿어지질 않네! 그 왁왁 타고 나르는 산악자전거를? 얌전한 친구가 그런 면이 있었나?” 의아해하는 내게, ‘그러게 말이야’만 되뇌면서 운전하는 P는 대학 동창이다. 캐나다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사이다. 그냥 같은 대학을 나온 인연 정도가 아니라, 밤샘 뒤 F동 복도에 깔린 고적함과 실기실 틈새로 스며 나오던 테레빈유 냄새의 진한 추억을 공유하는 사내들. 그중 하나인 J의 병문안을 가는 길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우리들, 묘한 인연이야. 자네가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진로를 바꾼다고 했을 때, J가 훑어 내리던 그 눈빛 기억해? 그 후로 십수 년을 연락도 없이 지내던 사이가 떡하니 캐나다에서 만났으니, 그것도 같은 교회에서….” 운전대를 ..
2026.08.09 -
다시 길 위에 선 시인 김준태, 세번째 시집 전자책으로 펴내
토론토에서 활동하는 김준태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다시 가본 길』(더포엠박스·151쪽)을 펴냈다.시집은 1부 ‘마른 휘파람 소리’, 2부 ‘담벼락에 핀 해당화’, 3부 ‘함께 부르는 노래’, 4부 ‘흐린 날 아침 잎새’ 등 네 개의 부로 구성됐다. 모두 70편이 실렸다. 1부에는 오랜 시적 화두와 최근 삶에 대한 성찰이 담겼고, 2부에서는 한국 여행 중 떠올린 감회가 잔잔히 흐른다. 3부는 ‘마을 사람들’ 연작을 중심으로 이웃 얼굴과 목소리를 불러내며, 4부에서는 가족과 관계 속에서 삶을 되돌아본다.김영제 시인이 쓴 해설을 보면 김시인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시집은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굴곡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것을 비껴 말하는 김시인 특유의 시적 태도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오랜 병고 속..
2026.08.03 -
코비드 연정(戀情)
“일어났어요?” “응, 오랜만에 꿈도 꾸고 푹 잔 거 같아. 당신은 어땠어? 발에 쥐 나던 건 괜찮아? 낌새가 오면 그냥 맥을 놔요. 허공이라 여기고 탁, 놔 버리면 금세 편해질 거야.” 폰을 열며 사이드 테이블에 붙여진 몇 장의 포스트잇을 살핀다. 오늘 중으로 해야 할 소소한 일거리와 약속이 읽힌다. 그중 하나에 눈길이 머문다. ‘한 지붕 아래 저만큼’. 아내가 있는 방문 앞에 물과 요기할 것을 놓고 와서 끄적거리다 잠들었던 생각이 든다. “당신 좋아하는 양념치킨인데 괜찮았어? 다행히 쪽문으로 테이크아웃 판매는 하더라고. 키위랑 사과 먹고 싶으면 얘기해요. 이따 커피 가져갈 때 깎아 갈게.” “코로난가 뭔가 덕에 호강이 넘치네! 하늘 같은 서방님이 매일 아침상을 차려주고. 당..
2026.08.01 -
비움의 미학
시집 다시 가본 길 김 영 제 (시인 - 시.6.토론토 동인) 1. 수남 김준태(樹南 金俊泰)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다시 가본 길’을 펴냈다. 감상, 한 꼭지를 부탁한다는 이메일에 담겨온 원고를 단숨에 읽었다. 여전히 맑고 따듯했다. 시편마다 느껴지는 눈길이 그렇고 들리는 호흡이 그랬고 담긴 마음이 역시나 그 김준태이지 싶었다. 조금 틈을 두고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다.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마른 휘파람 소리’는 ‘짧은 회개’ 등 그의 오랜 시적 화두와 함께 최근의 삶에 대한 심상을 노래한 18편. 제2부, ‘담벼락에 핀 해당화’는 ‘정동만추’ 등 한국 여행 중에 떠오른 소회를 그린 18편. 제3부, ‘함께 부르는 노래’에는 ‘Peter & Theresa’ 등 마을 사람들 연작시..
2026.03.20 -
며칠 만에 꺼내 본 생각
음악(On/Off) 오늘도 여긴 그냥 홀로 밤인데. 촘촘히 박힌 스테이플처럼 숱한 기억만 스멀거리던 하루였는데. 폰 속에 계시던 어머니, 자릴 옮기셨다 하네. 동생과 오르던 추억 속 외가의 선산. 비스듬히 누워계시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곁으로. 두루두루 전설 속의 평산 신씨 마을로. 그리워하던 이름 가득한 산그늘이니 다행이라고. 오늘은 삼우제로 곱게 안아드렸다고. 막내랑 큰누나, 오래 못 본 작은누나까지. 지나는 발걸음처럼 툭 말을 던지고 사라지는데. 부러 씩씩한 척하는 건 다 아는데. 어머니, 타고난 그 외로움은 다 벗으셨을까? 오래 기도했으니 그 어머니. 잘 생기신 아버지도 다시 만나고. 천안 삼거리 흥흥~ 스무 살 떨리던 마음으로 걷기도 하셨겠지? 돌 하나도 건성으로 보지 않던 그 성정...
2025.10.16